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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토크룸 (Talks)

미국 아카데믹 생존기(3): 시급 $15불 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by Dr.Yun in FL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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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뉴어 트랙 조교수라는 타이틀이 주는 안정감이 정말 컸던 걸까?"

 

30대 뒤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던 당시만 해도 어시스턴트쉽을 받고 박사학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것처럼, 박사를 시작하던 당시만해도 꿈도 꾸지 않았던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나니 마치 그것이 본래 내 것인양 느껴졌고, 전업맘으로 집에 주저앉아야 했을 땐 내 것을 빼앗긴 것처럼 억울한 감정마저 들더군요.

다들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나처럼 직업을 내려놓아야하는 것은 아닌데.. 한국 가족들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당시 나의 상황과 직업의 유동성이 없었던 남편의 상황, 모든 것을 알고 시작한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음에도 한동안은 제 마음을 긍정적으로 다잡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들이 만 3살이 될 때까지 온전히 육아맘으로 2년간 아이를 돌보며, 제 안에서는 그간 걸어온 삶과 앞으로 걸어가야할 삶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결론은 "내게 주어진 어떤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자."였습니다. 아들이 프리스쿨을 시작하던 첫 날부터 저는 바로 잡서치를 시작했고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어요. 아무것도 안되면 아들 프리스쿨에서 무료 봉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저는 간절히 사회 복귀를 원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2년 간의 경력단절 후 제가 시작한 일은 시급 $15불짜리 연구직이었습니다.
 

시급 $15불짜리면 어때? 봉사직도 감사할 판에... 

 

아침 9시에 아들을 프리스쿨에 내려두고 12시 픽업까지 3시간도 채되지 않는 시간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어요. 당시 제가 시급 15불을 받고 시작한 일은 초등학교에 방문해 아이들의 Literacy (읽고 쓰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일이었어요.  테스트가 잡혀있는 날이 아닌 경우도 저는 허락된 시간 내에서 매일 출근을 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오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말이죠. 일도 찾아서 했어요. 부모설문지 데이터 입력부터 파일 정리, 레이블 및 매뉴얼 만들기까지... 그렇게 한 1년 성실하게 시간을 보냈죠. 아들이 4살이 되었을 때, 저도 엄마로서 4살이 되었고, 엄마로 살아가는 생존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파트타임 포스트닥(박사후 연구원)으로 올려준다고?

 

직속 수퍼바이저였던 사라는 저와 동갑이었어요. 그녀는 지금도 저와 연을 이어가고 있는 좋은 친구입니다. 저는 미국으로 박사를 오기전 5년동안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었기에 여러 상관들을 만났었는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직장상사 및 선배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지더군요. 20대 때는 "내가 배울 만한 멘토를 만나고 싶다."에서 30대가 되니 "내가 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배워서 그걸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로 생각이 완전 바뀌었어요. 그런 와중에 만난 사라는 저에겐 고마운 사람이었죠.
 
그녀는 프로젝트의 PI (Principle Investigator)로 있던 교수에게 조금씩 저라는 존재를 어필해주기 시작했어요. "이런 능력을 가진 테스터가 있다." "박사학위도 있고, 연구경험도 많다."라고 미팅 때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날 교수가 저와 사라와 같이 셋이서 미팅을 제안하더군요. 저에게 Part Time Postdoctoral Scholar로 페이를 줄테니 자기랩에 들어오면 어떻겠냐고요. 저는 아래 같은 직업 코드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찌됐건 저의 시간당 페이도 조금 올랐고, 다른 연구교수, 박사과정 학생들과 연구 논문을 쓰는 일도 같이 시작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두 달여 후에 코로나19로 모든 업무가 재택으로 전환되었지만, 저는 주요 멤버로 남아 프로젝트에 계속 가담하며 더 높은 레벨의 테스크들을 해나가기 시작했어요. 
 

 

풀타임 포스트닥(Postdoctoral Scholar)로 다음 기회의 발판을 마련하다. 

 

그러던 어느날 사라가 구직 정보 하나를 보내주더군요. 당시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교육이 실시되면서 학생들 테스트를 직접 할 수 없게 되어 Florida Virtual School과 협업을 통해 온라인 테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연구분석가 (Research Analyst)를 뽑고 있으니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2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여기서 앞으로 더 올라갈 기회가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는데, 연구책임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런 기회는 희박하다는 것을 직감했죠. 이왕 지원서를 준비할 거라면 추천서도 부탁해야하니 몇 군데 더 지원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제가 졸업한 학과와 협업 중인 Prevention Research Center에서 풀타임 포닥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당시 면접을 3군데 보게 됐고, 최종적으로 제 관련 전공 분야의 풀타임 포닥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다시 한번 제기를 노릴 수 있는 기회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연구교수(Research Professor)로 다시 일어서다. 


당시 아들이 킨더를 시작하면서 3시까지 제가 일로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고, 그렇게 다시 풀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년 반여를 진짜 성실히 일했어요. 말은 포닥이었지만 일단 저를 트레이닝할 만한 교수가 있는 연구 센터 상황이 아니었고, 저 스스로도 많은 경력이 쌓였던 지라 일반 포닥과는 포지셔닝이 달랐기에 스스로 자생하며 제 자리를 확보해 나갔습니다. 제 핵심 업무는 데이터 분석과 통계였어요. 각종 그랜트를 통해 들어오는 데이터들을 관리 분석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을 주업무로 했는데, 일단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 센터에 아무도 없었다 보니 제 입지를 좀더 견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미국 정부 연구보조금, 즉 그랜트를 따기 위한 그랜트 라이팅을 배우기 시작했구요. 2년 반 정도의 포닥 생활 후 6밀리언 달러, 한화로는 80억에 해당되는 그랜트의 Co-PI (Co-Investigator)로 참여하게 되면서 제 커리어에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죠. 이 기회를 통해 저도 연구교수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 한글자로 요약된 "승진 (Promoti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과 눈물같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이 이야기는 다음 번 시리즈에서 이어가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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