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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토크룸 (Talks)

미국 아카데믹 생존기(2): 미국 조교수에서 시급 $15 연구원?! (Ft. 경단녀, 워킹맘, 전업맘, 경력단절)

by Dr.Yun in FL 202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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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사는 윤언니입니다. 아.. 오늘은 글 제목만 썼는데도 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서 글을 풀어나가야 할 것 같네요 ㅎㅎ

Career Suicide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좀 센 영어표현인데, 평범한 표현으로는 Career Gap, 한국식 표현으로는 "경력단절"을 의미합니다. 경제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30대쯤 특히 여성에게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임신-출산-육아"일 텐데요. 특히,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고유한 영역이기에 우리나라에선 2007년에 "경단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죠. 
 
아동가족학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동발달, 인간생애주기발달, parenting 수업을 대학에서 주과목으로 가르치며, "임신-출산-육아" 분야에서 이론으론 자신감 넘쳤던 저였는데, 2015년 제 인생 안으로 걸어 들어온 현실의 "경력단절 삼종세트"는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결국 저도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경단녀의 험난한 길에 들어서게 되었죠. 
 

1. 미국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2년 후 나는 사직서를 썼다. 

 
2011년 미국으로 박사를 와 4년 후인 2015년도에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한 저는 조지아에 있는 티칭 스쿨에서 테뉴어트랙 조교수로 저의 첫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박사학위 디펜스를 앞두었던 마지막 학기 저도 잡마켓에 뛰어들어 지원서를 뿌리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저는 네이티브가 아닌 영어 실력과 겸손한 논문 실적 등으로 취업의 앞날이 어두웠던 터라 어떤 곳이라도 불러주면 가겠다는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지원서를 냈었어요. 그러던 중 박사논문 디펜스 다음날 한 대학의 학과장으로부터 캠퍼스 초대 전화가 왔고 저는 부르면 바로 달려가겠다는 아주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죠. 그렇게 면접을 보고 채용이 확정이 된 후 2015년 9월 1일자 첫 출근을 하게 되는데, 때마침 하나 더 날아든 서프라이즈 소식은 바로 저의 임신이었어요.
 
당시 저는 이미 30대 중반이었기에 새로운 직장과 임신 소식으로 개인적으로는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하지만 당시 장거리였던 남편과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저는 갑작스럽게 날아든 기쁜 소식들에 취해 마냥 행복해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죠. 
 
제대로 가르쳐본 적 없는 학부 수업 4과목을 할당받아 첫 학기부터 영어 강의 준비에 돌입했고, 당시 결혼식과 출산 준비까지.. 이 모든 것들을 혼자 주도하며 준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2016년 4월말, 강의를 한주 일찍 끝내고 제 예정일이던 그 주 주말에 출산을 하게 되죠 (휴~~~ 짧은 몇 줄에 다 담지 못하는 저에겐 정말 전력질주 같은 일여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출산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장거리였어요. 플로리다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과 조지아에서 일하던 저와의 거리는 차로 3시간 반 정도였는데, 저는 용감무쌍하게 소위 말해 아이를 업고 일하러 나가는 반싱글맘의 생활을 1년 더 이어나가게 되죠. 매일 아침 출근길 저희 과에서 운영하던 Child Development Center에 3개월된 아기를 내려놓고, 강의 사이에는 모유수유를 하고, 퇴근 후에 아기를 데려와 혼자 씻기고 먹이고, 4-5시간마다 깨는 아기를 홀로 돌보며 저는 거의 매일 4-5시간 쪽잠을 자며 임신과 출산, 육아를 이어갔습니다. 남편은 주로 금요일 밤에 조지아로 와서 주말동안 저와 아기를 도와주고 다시 플로리다로 돌아갔구요. 그렇게 장거리 육아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특히 저는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오고 있음을 깨달았죠. 
 
아직 면역이 생기기 전인 신생아 시기부터 데이케어 생활을 시작한 아들은 한달에 한 번이 멀다 하고 중이염 및 수족구 등을 앓았고, 고열로 아이를 데이케어에 데려갈 수 없을 때마다 저는 아기를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직장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남편 또한 2년을 장거리 운전을 하며 플로리다-조지아를 왔다갔다 하느라 중요한 일들을 놓쳐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고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내가 만들고자 했던 가정이 풍지박산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저는 조교수로 일한 지 2년이 되던 2017년 여름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2. 전업맘(Stay-at-home Mom)이 되다. 

 
퇴사후 저는 조지아에서 가족이 있는 플로리다도 돌아왔어요. 박사로 유학을 와 제가 처음 정착한 도시였기에 저에겐 미국에서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죠. 2019년 만 3세 아들이 프리스쿨을 시작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저는 풀타임맘으로 육아에 전념하게 됩니다. 현장경험과 아동발달이론 등에 자신이 있었던 저였지만, 스스로 집안일에는 큰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24/7 육아의 굴레에 빠지고 보니 35년 이상을 뭔가 목표를 정하고 달려오던 삶에서 한순간 돌아보니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더군요.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되었지만 나 스스로에 대한 아이덴티티 또한 너무나 중요했고 잃고 싶지 않았기에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을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 삶의 "두번째 사춘기"와도 같은 시간이었던 같아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삶의 살고 싶은지 근원적인 질문들이 저의 내부에서 끊이지 않고 일었습니다. 특히, 한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삶의 의미 또한 질문이 되어 제게로 돌아왔고요. 
 
 2년간의 풀타임 육아와 끊이지 않는 생각의 더미 속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 일을 잘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 종종 면접 서류도 내보았으나, 되는 일이 잘 없더군요.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제 마음이었어요.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의 첫 생애 3년만큼은 "네가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만큼 내가 너의 곁에 있어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아들이 만 3세가 되어 엄마와 떨어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을 때쯤 9-12시까지 하는 반일반 프리스쿨에 등록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기로 결심했죠. 당시 저는 정말 일이 하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안되면 아들 프리스쿨에서 봉사활동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을 정도로 사회에 다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어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저는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던 거죠.
 

3. 조교수에서 $15불 연구원으로 다시 커리어를 이어가다. 

 
아들이 프리스쿨 시작과 함께 지원서를 몇 군데 내었고 제가 졸업한 대학의 한 연구센터에 파트타임 연구원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아들을 9시에 프리스쿨에 내려주고 출퇴근 운전시간 마저 빼면 2시간 반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꾸준히 1년을 일하다 보니 제 업무 범위도 늘더군요. 제가 맡은 업무자체는 미미했지만, 당시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하버드대학과 협업 중인 상당히 규모가 큰 연구 프로젝트였어요. 테스터들이 모아 온 데이터들을 입력하고 분석하고 연구보고서 및 논문을 쓰는 것까지 그간 박사 학위 과정을 하면서 트레이닝을 받은 저에겐 너무나 익숙한 과정의 작업들이었죠. 그렇게 1년을 성실히 일하고 나니 연구책임 교수가 자신이 운영하는 연구랩에 파트타임 포스트닥 연구원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하더군요. 하지만 몇 주가 지나지 않은 2020년 초 세계를 패닉에 빠지게 만든 코로나19가 터지게 됩니다. 
 
비록 시간당 15불을 받는 파트타임 연구원으로의 복귀였지만 저는 다시 일할 수 있음에 마냥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일에 복귀하지 못하고 이대로 집에 주저 않으면 어쩌나 그게 더 두려웠거든요. 내가 그간 열심히 쌓아 올린 박사학위며, 교수직을 다 내려놓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저의 결심으로 인해 생겨버린 2년간의 커리어 공백이 이렇게 긴 복귀 과정을 거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저도 사람이기에 때론 억울한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어떤 순간에도 제게 주어진 일을 게을리하거나 불평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게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분명 저는 온전한 엄마가 되기로 했던 그 선택을 똑같이 했을 거구요.
 

 
2020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비상사태였던 코로나와 함께 길고 긴 제 커리어 인생 암흑 터널도 한동안 계속 되었는데요.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여전히 인생의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던 제 커리어 인생에도 다시 한번 변곡점이 되는 일이 찾아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번 스토리에서 이어갈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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